중앙행정기관 독립후 재임 36명 중 35명이 공무원 출신

지난해 12월 20일 정부세종청사 공정거래위원회 4층 심판정. 채규하 당시 상임위원(현 사무처장)은 독일에 본사를 둔 글로벌 그룹 지멘스의 시장지배적 지위남용 행위 등에 대한 건을 심의한 이날 오후 전원회의에 위원석이 아닌 반대편 참관인석에 앉아 있었다.

지멘스 건을 조사해 심의에 부친 서비스업감시과는 시장감시국 소속으로  채 상임위원은 2016년 1월부터 지난해 2월까지 시장감시국장으로 재직하며 관련 사건 조사를 지휘해 제척 사유에 해당되었기 때문이다.

◆‘경제검사→판사’ 변신... 제척 사유로 심의에 참석 못하기도

공정거래법에 따르면 상임위원 등 위원은 자기가 공정위 소속 공무원으로서 당해 사건의 조사 또는 심사를 행한 사건에 대한 심의·의결이 있을 경우 제척된다(법 제44조 제1항 제6호).

채규하 상임위원은 2016년 사무처 소속 시장감시국장으로 있으면서 글로벌 통신칩셋 사업자 퀄컴의 시장지배적 지위남용 행위에 대한 건 전원회의 심의에서 심사관을 맡아 공정위 사상 최대 금액인 1조311억원의 과징금 부과를 이끌어냈다.

공정위 심사관은 형사재판으로 치면 검사에 해당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심사관인 채규하 시장감시국장은 지난해 2월 1심법원의 판결에 준하는 제재 수준을 결정하는 공정위의 상임위원에 임명되며 일순간 검사에서 판사의 신분으로 바뀌었다.

채규하 상임위원은 이달 23일 인사에서 경제검사의 수장 역할을 하는 공정위 사무처장에 임명돼 다시 ‘검사’로 되돌아왔다.

 

▲ 2016년 7월 20일 열린 퀄컴의 시장지배적 지위남용 행위 건에 대한 첫 공정위 전원회의 심의 때 채규하 당시 시장감시국장(뒷모습 오른쪽에서 2번째)은 형사재판의 검사에 해당하는 심사관으로 참여했다.
▲ 2016년 7월 20일 열린 퀄컴의 시장지배적 지위남용 행위 건에 대한 첫 공정위 전원회의 심의 때 채규하 당시 시장감시국장(뒷모습 오른쪽에서 2번째)은 형사재판의 검사에 해당하는 심사관으로 참여했다.
▲ 지난해 2017년 6월 28일 채규하 당시 상임위원(맨 오른쪽)은 김상조 공정위원장이 취임 후 처음으로 주재한 전원회의에서는 위원석에 앉았다. 그는 이달 23일 경제검사의 수장인 사무처장에 임명됐다.
▲ 지난해 2017년 6월 28일 채규하 당시 상임위원(맨 오른쪽)은 김상조 공정위원장이 취임 후 처음으로 주재한 전원회의에서는 위원석에 앉았다. 그는 이달 23일 경제검사의 수장인 사무처장에 임명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공정위 사무처 소속인 장덕진 소비자정책국장과 박재규 경쟁정책국장을 상임위원에 임명했다.

공정거래법 등 소관 법률을 위반한 혐의가 있는 사업자에 대해 심의해 제재 수준을 결정하는 전원회의 심의 때 주심을 맡게 되는 상임위원 3명 중 2명이 검사복을 벗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당분간 ‘제척 사태’는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12월 19일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가습기 살균제 사건처리 문제와 관련 “조직을 대표하는 위원장으로서 공식적으로 진심어린 유감을 표명하며 특히 피해자분들께 사죄의 말씀을 드린다”고 고개를 숙였다.

공정위가 같은 해 9월에 구성한 '가습기 살균제 사건처리 평가 TF(팀장 권오승 서울대 명예교수)'는 이날 최종 조사 결과 발표를 통해 “CMIT/MIT 함유 가습기 살균제 판매사업자에게 심의절차종료 결정을 내린 것은 표시광고법의 입법취지와 표시·광고의 사회적 기능에 비춰 너무 엄격하게 해석하는 등 실체적 측면에서 잘못이 있었고, 절차적 측면에서 사건의 중대성을 감안할 때 처음부터 전원회의가 아닌 소회의에서 논의한 것은 적절하지 않았다”고 지적하며 공정위가 조속한 시일 내에 추가적인 조사와 심의를 통해 적절한 조치를 취해 줄 것을 권고했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지난 2016년 8월 12일 공정위 제3소회의가 심의해 사실상 무혐의 처리와 같은 심의절차종료 결정을 내렸다.

위원 3명으로 구성하는 소회의는 상임위원 2명이 심의에 참여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가습기 살균제 사건 심의는 김성하 당시 상임위원 1명만 의장으로 참여하고 나머지 2명은 비상임위원으로 채워졌다. 김석호·신동권 당시 상임위원은 위원으로 임명되기 전 이 사건 조사를 담당한 서울사무소장을 맡은 적이 았어 모두 제척 사유에 해당되었기 때문이다.

가습기 살균제 재조사는 당초 조사를 진행한 서울사무소 소비자과가 아닌 본부 소비자정책국 소속 소비자안전정보과에 맡겨졌다. 재조사 결과를 담은 심사보고서는 지난해 12월 피심인 사업자에게 송달돼 내달 초 전원회의 심의에 부쳐질 것으로 알려졌다.

가습기 살균제 재조사를 총괄한 소비자정책국 장덕진 국장은 이달 23일 상임위원에 임명되는 바람에 심사관으로도, 사건을 심의해 의결하는 위원으로도 참여하지 못하게 됐다. 또 공석이 된 소비자정책국장은 공모직으로 지정돼 있어 새 국장을 임용하는 데도 적잖은 시일이 소요될 수 밖에 없는 처지다.

장덕진 새 상임위원은 김상조 공정위원장과 서울대 경제학과 81학번 동기로 알려져 있어 세간의 시선도 곱지 않다.

◆최근 10년새 상임위원 13명 중 단 1명만 변호사 출신

합의제 중앙행정기관인 공정거래위원회 설치 근거가 되는 공정거래법은 9명의 위원을 위원장, 부위원장, 상임위원 3명, 비상임위원 4명으로 구성하도록 규정하며, 위원의 자격에 대해 ▶2급 이상 공무원 ▶판사·검사 또는 변호사 경력 15년 이상 소유자 ▶법률·경제·경영 또는 소비자 관련 분야 학문을 전공하고 대학이나 공인된 연구기관에서 15년 이상 근무한 자로서 부교수 이상 또는 이에 상당하는 직위 경력자 ▶기업경영 및 소비자보호활동에 15년 이상 종사한 경력자 중 어느 하나를 충족하는 사람을 임명 또는 위촉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본지 취재 결과 최근 10년 동안 임명된 공정위 상임위원 13명 중 12명은 공정위 출신 국장(2급)으로 채워졌고, 나머지 1명만 변호사로 충원된 것으로 나타났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사업자의 시장지배적 지위의 남용과 과도한 경제력의 집중을 방지하고, 부당한 공동행위 및 불공정거래 행위를 규제하여 공정하고 자유로운 경쟁을 촉진함으로써 창의적인 기업활동을 조장하고 소비자를 보호함과 아울러 국민경제의 균형있는 발전을 도모하는 것을 목적으로 제정한 공정거래법(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에 따라 1981년 4월 당시 경제기획원(현 기획재정부) 내 설치됐다.

이후 1994년 12월 공정거래법이 개정되며 공정위는 국무총리 산하 중앙행정기관으로 독립됐다.

중앙행정기관으로 격상된 후 공정위 상임위원에 임명된 36명(2번 임명 포함) 중 단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행정부처 공무원이 차지했다. 이중 일부는 공정거래 관련 법과 크게 관련이 없는 부처 출신으로 드러나 '무자격 임용' 논란이 일었다.

 

▲ 최근 10년 동안 임명된 공정위 상임위원 현황. [출처=공정위 홈페이지 등 자료 취합]
▲ 최근 10년 동안 임명된 공정위 상임위원 현황. [출처=공정위 홈페이지 등 자료 취합]
 
 
 
 
▲ 1994년 12월 공정위가 중앙행정기관으로 독립된 후 임명된 상임위원 현황(A~C그룹은 편의상 분류한 것임).
▲ 1994년 12월 공정위가 중앙행정기관으로 독립된 후 임명된 상임위원 현황(A~C그룹은 편의상 분류한 것임).

지난 2003년 4월 하순 공정거래위원회(당시 위원장 강철규)는 “상임위원(별정직 1급) 선임에 있어 종래의 내부승진 관행을 깨겠다”며 내·외부 전문가를 대상으로 공개 모집한다는 임용계획을 공고했다.

다음달 2일까지 원서를 접수한 결과 총 7명의 응모자 중에는 공정위 내부 국장 4명, 다른 부처 국장 1명 외 변호사, 경제학과 교수 2명이 포함돼 있다고 당시 공정위가 널리 알렸지만 내부승진 관행은 깨지지 않았다.

공정위가 처음 도입한 공모를 통해 임명한 새 상임위원은 서동원 당시 기획예산처 재정개혁국장이었지만 그는 기획예산처에서 근무하기에 앞서 공정위 독점국장 등을 지낸 것으로 드러났다.

공정위 상임위원 자리가 ‘그들만의 리그’에 의해 채워지고 있다는 비판에서 벗어나려면 우선 공정위 내부의 자체 성찰과 대안을 제시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공정거래법이 규정한 위원 자격 요건은 단지 비상임위원 위촉용에 불과할 뿐이다.

비상임위원도 의결 때 상임위원과 같은 한 표를 행사하지만 전원회의 주심은 물론 소회의 의장을 맡을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공정위 회의운영 및 사건절차 등에 관한 규칙(고시)은 제6조(의사 및 의결정족수) 제3항에 “소회의 의사는 상임위원 중 위원장이 지정하는 위원이 주재한다”고, 제30조(주심위원의 지정 및 임무 등) 제1항에 “전원회의 의장은 심사보고서를 제출받은 경우 상임위원 1인을 당해 사건의 주심위원으로 지정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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